“요즘 무슨 일 해?” “이것저것 해요.” “그게 무슨 뜻이야? 회사 다니는 줄 알았는데…” “회사도 다니죠. 그런데 저녁에는 온라인으로 테니스용품을 팔고, 주말에는 친구와 이벤트 회사를 운영해요.”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의 대화다. 명함을 달라고 했더니 세 장이나 건넨다. 비슷한 사례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직업’으로 사람을 이해하려 한다. 의사, 교사, 공무원, 회사원처럼 명함에 적힌 한 줄이 그 사람을 설명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그 틀을 벗어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인공지능(AI)과 기술 발전이 있다. AI와 플랫폼의 결합은 노동시장을 직업 중심에서 ‘업무’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AI가 직업을 통째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업무를 하나씩 쪼개 대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계사’라는 직업을 보자. 데이터 입력은 자동화되고, 간단한 검증도 프로그램이 수행한다. 반면 해석하고 판단하며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하나의 직업에 묶여 있던 여러 업무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채용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회계사 1명 채용’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데이터 정리할 사람, 분석할 사람, 자문할 사람을 각각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플랫폼 노동과 프리랜서 시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경쟁력은 직업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에서 나온다.
최근 블루칼라 직무 선호가 높아지는 현상도 같은 흐름이다.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자동화하기 어려운 일이 더 가치 있어진다. 손으로 해야 하는 일, 현장에서 판단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점점 ‘직업의 이름’보다 ‘실제로 하는 일’을 기준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이 바뀌고 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변화에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다. 먼저 개인의 대응이다. 하나의 직업에 기대는 대신 여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조합, 즉 ‘업무 포트폴리오’가 중요해지고 있다. 자기 일을 업무 단위로 나눠 이해하고, 변화에 따라 이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한 번 배운 것으로 평생을 버티는 시대는 끝났다.
정책 변화도 필요하다. 현재의 교육, 훈련, 고용 서비스는 여전히 직업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이 업무 단위로 재편된다면 정책 역시 이에 맞게 전환돼야 한다. 교육과 훈련은 세분화된 업무 역량 중심으로 개편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미국의 주요 기업 중에는 채용 과정에서 학사 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곳이 늘고 있으며, 실질적인 업무 역량을 중심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용 서비스 역시 ‘직업-사람’ 매칭에서 ‘업무-역량’ 매칭으로 진화해야 한다.
사회보장제도 변화가 요구된다. 다양한 업무를 병행하는 노동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직장 중심 고용보험 체계는 사각지대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직장’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보호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노동시장 정보 역시 바뀌어야 한다. 어떤 직업이 유망한지가 아니라 어떤 업무가 늘어나고 어떤 업무가 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정보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업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의미는 달라지고 있다. 이제 직업은 다양한 업무를 묶어주는 하나의 ‘포트폴리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조합조차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문제는 이 변화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응하느냐다.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좋은 직업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출처: 이코노미조선(http://economychosun.com)